김동리 작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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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로는 소설집으로 《무녀도(巫女圖)》(1947) 《역마(驛馬)》(1948) 《황토기(黃土記)》(1949) 《귀환장정(歸還壯丁)》(1951) 《실존무(實存舞)》(1955) 《사반의 십자가》(1958) 《등신불(等身佛)》(1963), 평론집으로 《문학과 인간》(1948), 시집으로 《바위》(1936), 수필집으로 《자연과 인생》 등이 있다 예술원상 및 3·1文化(culture) 상 등을 받았다. 동리는 연산군 때 무오사화에 얽혀서 부관참시 당한 정필재 김종직선생의 17대손으로 선산 김씨이다. 그러한 생활동안 그들은 자신들의 선산(先山)묘에 모든 신앙과 길흉화복을 걸어 놓고 살았다.김동리 작가론 김동리 작가론 김동리 작가론 김동리 작가론 김동리 작가론 김동리 작가론 김동리 작가론
김동리의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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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청년문학가협회장, 1951년 동협회부회장, 1954년 예술원 회원, 1955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 1969년 문협(文協) 이사장, 1972년 중앙대학 예술대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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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임수는 살림이 번창하자 인심이 좋아지고, 술이 과해지기 시작했다. 아들 영봉이 어느 정도 혼자 가게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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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김동리는 1913년 음력 11월 24일 경상북도 경주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후 몇 편의 시를 발표하다가 소설로 전향하면서 19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화랑의 후예》,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화》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서의 위치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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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의 아버지
이때 발표한 평론으로, 《순수문학의 진의》(1946) 《순수문학과 제3세계관》(1947) 《민족문학론》(1948) 등을 들 수 있다 작품 활동 초기에는, 한국 고유의 토속성과 외래사상과의 대립 등을 신비적이고 허무하면서도 몽환적인 세계를 통하여 인간성의 문제를 그렸고, 그 이후에는 그의 문학적 논리를 작품에 반영하여 작품세계의 깊이를 더하였다. 동리의 조부(김동범)도 대구 밀양 쪽의 선산을 지키고 살았다고 한다. 그는 장사가 좀 되기 시작하자 땅을 사들였는데, 주로 산소와 논밭을 사들였다. 아버지 김임수의 돈을 모으고 재산을 지키는 노력은 대단했다. 부관참시라는 흉악한 형벌을 당하자 그 직계 자손들이 화를 피해 경주군(지금의 월성군)서면 ‘계림골’로 숨어 버린 채, 오랫동안 초야에 묻혀 살았다. 동리의 둘째 형 영봉은 아홉 살 때부터 등짐을 지고 아버지를 따라 장터를 다니며 고생하였는데, 아버지는 영봉에게 가게 일을 보는 것을 가르쳤다. 그중 동리의 아버지는 김임수(1871년~1928년)는 막내로 태어났다. 동리의 아버지 김임수는 할아버지 김동범이 경주까지 와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때, 제물 장사를 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집안을 일으킨 자부심도 강하였다. 동리네 집안 조상들은 조상을 끔찍이 섬겼고, 그 집안 여성들은 가족(남편,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고 한다. 1973년 중앙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1년 4월 예술원 회장에 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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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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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문학과 신인간주의(新人間主義)의 문학사상으로 일관해 온 그는 8·15광복 직후 민족주의문학 진영에 가담하여 김동석(金東錫)·김병규와의 순수문학논쟁을 벌이는 등 좌익문단에 맞서 우익 측의 민족문학론을 옹호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6·25전쟁 이후에는 인간과 이념과의 갈등을 조명하는 데 주안을 두기도 하였다.
김동리의 호적명은 창귀(昌貴)이며, 족보명은 태창(泰昌), 자는 시종(始鍾), 호는 동리(東里)이다. 당시 제사에 쓰이는 모든 물건, 즉 제수과일, 명태 등의 장사는 썩 잘되는 편이었다.
경주군 서면으로 온 김동범은 월성 이씨인 이화(李和)와 결혼 해서 2남 3녀을 두었다. 아버지 김임수는 집안을 일으킨 장본인답게 배짱도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여유가 생기자 아버지는 성안 노동동에 가게를 하나 마련하여 정착하게 된다된다. 1934년 시 《백로》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함으로써 등단하였다. 아들 영봉이가 등짐을 지고 장으로 나갈 때 짚신이 끊어져서 맨발로 걸어야 했을 때도 고무신 하나를 안 사 줄 정도로 구두쇠였지만 그런 비장한 각오로 인해 가게는 날로 번창해 갔으며 나중에는 ‘성 밖의 부자’로 소문이 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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